어느날 갑자기 계좌가 ‘지급정지’된 상인

알아보니 계좌가 피싱사기에 연루됐단 이유

까다로운 이의신청, “직원 월급도 입금 못해”

은행은 “피싱 증가로 모니터링 강화 불가피”

전문가들 “소액 피해면 계좌제한 제외해야”

서울 종로구 북촌한옥마을을 보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여있다. 인근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 한명 때문에 모든 은행 계좌가 막히는 일이 생겼다. 김도윤 기자.
서울 종로구 북촌한옥마을을 보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여있다. 인근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 한명 때문에 모든 은행 계좌가 막히는 일이 생겼다. 김도윤 기자.

[해외 토토사이트 운영경제=김도윤 기자] ‘전화금융사고로 등록돼 거래 불가’

10년 넘게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잡화점을 운영해 온 A씨는 지난달 17일 KB국민은행 모바일 뱅킹으로 세입자 보증금을 돌려주려다가 자신의 계좌가 지급정지됐다는 걸 알았다.

깜짝 놀란 A씨가 알아보니 사기 의심 계좌로 분류돼 거래가 막힌 것이었다. 7월 말 어느 외국인 손님이 14만5000원을 결제하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람이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계된 인물로 의심받자 A씨의 계좌가 ‘3차 사기 의심 계좌’에 오른 것. 은행 고객센터에선 사기 의심 계좌 이의신청 절차를 안내하며 영업점을 방문하라고 했다.

A씨는 이튿날 은행 창구를 찾아 소명했다. 정상 거래였음을 입증해야 했다. 은행은 사고 당일 폐쇄회로(CC)TV 영상을 소명 자료로 제출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의 영상은 이미 삭제된 상태. A씨는 손님 이름과 연락처·주소라도 전달했지만 이것만으로 은행은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다른 금융사 계좌도 연쇄적으로 정지된 것이다. 그는 급한 대로 연이율 18%짜리 카드론과 친척의 도움으로 목돈을 마련해야 했다.

불과 14만원에, 영문도 모르게 계좌 멈췄다

현행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사기에 이용된 계좌가 발견되면 피해자 신고가 없더라도 금융사가 자체적으로 지급정지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사기 범죄에서 피해자 보호를 기민하게 하려는 취지에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범죄와 무관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특히 A씨처럼 사업자인 경우 당장 계좌를 쓸 수 없으면 자금이 흐름이 막히게 돼 타격이 크다. 당사자는 이의신청을 할 수 있으나 짧으면 2주에서 길면 3~4개월을 기다려야 지급정지가 해제된다.

현재 A씨의 은행계좌 4개는 입출금이 제한돼 있고, 증권사 2개 계좌도 제 기능을 못 한다. 못한다. 때문에 매출대금 입금과 직원 월급 지급에 차질을 겪고 있다고 A씨는 호소했다. 그는 “은행 업무를 보느라 이틀 넘게 가게 문을 닫아야 했고 거래처와 신뢰 문제가 불거져 난처한 상황”이라며 “법적 근거가 있는 조치라고 해도 은행이 입증 불가능한 자료를 요구하며 이의제기를 봉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A씨는 지난 17일 오후 9시께 모바일 뱅킹을 통해 세입자 보증금 지금을 위한 잔금을 치르려 했지만 모든 계좌가 정지돼 은행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모바일로 계좌이체를 하려 해도 ‘사고신고’가 접수됐다는 안내만 뜰뿐이었다. [독자 제공]
A씨는 지난 17일 오후 9시께 모바일 뱅킹을 통해 세입자 보증금 지금을 위한 잔금을 치르려 했지만 모든 계좌가 정지돼 은행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모바일로 계좌이체를 하려 해도 ‘사고신고’가 접수됐다는 안내만 뜰뿐이었다. [독자 제공]

이에 대해 은행들은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사기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선제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엔 머신러닝 기반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과 24시간 전담 모니터링팀을 운영하며 의심 거래를 실시간 차단 중”이라며 “지급정지를 제때 하지 못하면 피해 정도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질 수 있어서 선제적으로 엄격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씨가 연루된 보이스피싱 사건은 현재 수원 팔달경찰서에서 수사하고 있다. 피해금의 흐름을 따라가며 일당을 추적하는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기관을 사칭한 사기 조직의 피해금이 A씨의 가게에서 물건을 계산한 외국인 관광객의 계좌로 들어갔고 그 돈이 A씨의 계좌에 입금되자 은행이 계좌를 정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지급정지는 은행이 진행했기에 경찰은 금융기관이 요구하는 자료를 요청해서 이의신청 과정을 거쳐 잘 소명을 하고, 중재가 되지 않는다면 금융감독원에 구제신청을 하라고 안내드린다”고 설명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은 기사와 무관. [게티이미지뱅크]

피싱에 엄격한 은행, ‘선의의 피해자’ 못 막나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2020년부터 올해 1분기까지 사기 이용 계좌로 신고돼 6대 시중은행이 지급정지한 계좌는 총 15만82개다. 지급 정지 계좌 수는 해마다 증가세를 보인다. 피싱 사기가 좀처럼 근절되지 못하는 마당에 은행이 의심 계좌를 선제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대처하는 건 자연스럽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또 발생하는 건 문제다.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싱수법이 다양화·고도화되는 만큼 안전한 전자금융거래를 위해선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필요하다”며 “다만 그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수사당국과 금융당국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형원 법무법인 YK변호사는 “허위로 말을 맞춰 상품거래를 위해서 한 것이라 해두고 사기 피해금을 세탁하려는 사례도 있어 은행권은 더 엄격한 기준으로 소명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다만 일정 금액 이하의 소액이라면 계좌 제한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kimdoyo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