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닌 토토사이트 썸을 실시한 가마쿠라 막부 최고 권력자 호조 사다토키[출처 :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
‘에이닌 토토사이트 썸을 실시한 가마쿠라 막부 최고 권력자 호조 사다토키[출처 :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

한번 빚의 늪에 빠져들면 여간해서는 빠져나오기 힘들다. 고리대금의 덫에 걸리면 더더욱 그렇다. 이때 정부가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하면 채무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구세주는 없을 것이다. 실제 일본의 무사정권 시대인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시대(1185~ 1573년)에 그런 사례가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는 무사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기 위해 이들이 담보로 잡힌 토지와 물건을 되돌려주어 원상회복하도록 채권자인 금융업자들에게 명령토토사이트 썸. 이른바 ‘에이닌 덕정령(德政令)’이다. 정권의 핵심 지지기반인 무사계급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일본 역사상 대표적인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 사례로 기록된다.

최초의 빚 탕감 정책 ‘에이닌(永仁) 토토사이트 썸

중국을 점령해서 황제 자리에 등극한 원의 쿠빌라이 황제는 일본 정벌에 나서 1274년 여몽연합군 3만여 명의 병력과 900여척의 병선, 1281년에는 14만여 명과 병선 4400척을 동원하여 두 차례에 걸쳐 규슈지방 상륙을 시도한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군의 완강한 저항과 때마침 불어 닥친 태풍(가미카제)에 쿠빌라이의 군대는 궤멸된다. 전투에 참가했던 막부 휘하의 무사들은 전시에 자신의 가신들을 이끌고 장기간 전투 현지에 머물면서 스스로 모든 비용을 조달해야 토토사이트 썸. 자금 마련을 위해 토지를 매각하거나 빚을 갚지 못해 담보로 잡힌 땅을 잃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무사들은 막부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자 불만이 비등토토사이트 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93년 가마쿠라 막부의 본거지인 가마쿠라 시내에서 진도 7의 초대형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건물들이 붕괴되고 2만3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토토사이트 썸. 이를 두고 시중에서는 막부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시련을 내렸기 때문이라며 민심은 흉흉해졌다.

정권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낀 막부 집권자 호조 사다토키는 1297년 무사들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한 조치로서 ‘막부 휘하의 무사가 소유했거나 담보로 잡힌 땅은 원주인에게 무상으로 반환할 것’을 골자로 하는 에이닌 토토사이트 썸 즉 부채 탕감 조치를 내렸다.

이에 무사들은 크게 환호토토사이트 썸. 그러나 돈을 떼여서 큰 손해를 보게 된 채권자인 금융업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자금 회수가 불가능한 무사들에게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자금 융통이 막힌 무사들은 빚조차 질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서 생활은 더욱더 궁핍에 내몰렸다. 결국 이 정책은 당초의 취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으며 채 1년도 지나지 못하고 폐기되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토토사이트 썸.

원래 덕정이란 ‘군자가 덕을 베풀어서 세상을 다스린다’. 즉 선정 통치를 의미하는 중국의 사상인데 전한 시대의 유학자 동중서의 ‘춘추번로’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에이닌 덕정령이 나온 이후부터 본래의 뜻과는 달리 빚 탕감이 곧 덕정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토토사이트 썸. 에이닌 덕정령은 일본역사에서 정권이 ‘덕정’이란 이름을 내걸고 빚을 탕감하여 준 최초 사례다.

도소(전당포)를 습격, 물건을 들고나오는 백성들  [출처 : 야후재팬 화상]
도소(전당포)를 습격, 물건을 들고나오는 백성들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악마의 디테일’ 화폐토토사이트 썸 침투

막부 휘하 무사들의 생활이 궁핍으로 내몰리게 된 데에는 몽골군 침공을 맞아 군역과 그 소요 비용을 자비로 조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무사들이 궁핍해진 것은 비단과 쌀 등 물물교환 경제가 화폐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데서 그 요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마쿠라 막부가 초기에 비단을 법정화폐로 삼고 있다가 중국 송의 동전인 송전으로 이를 대체하자 경제생태계는 대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기존의 귀족 불교가 서민들까지 널리 전파되면서 불교계에 대변혁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이에 따라 곳곳에 불사와 불상 건립이 추진되면서 이에 필요한 동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원래 일본에서 송전이 수입된 것은 송전을 화폐로 쓰려했던 것이 아니라 불상 제작 원료로 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시중에 널리 유통되면서 점차 화폐 기능을 담당해 나가기 시작토토사이트 썸.

지방의 무사들에게는 교토나 가마쿠라 등의 대도시에 가서 치안을 담당하는 군역의 의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무사들에게 도시생활은 필요한 물건을 화폐로 구입하는 낯선 생활이었다. 화폐경제에 익숙하지 못한 무사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내빈 유혹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토토사이트 썸. 사치품 구입 등 과소비에 나서면서 고리대금업자에게 1년 치 이자가 무려 100%나 되는 돈을 빌렸다.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갑옷을 담보로 잡히거나 심지어 자기 하인을 고리대금업자에게 팔아넘기는 일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가마쿠라시대 ‘산노레이겐키’). 화폐경제의 침투는 무사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가 고리대금업자의 손에 넘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파산이 속출하여 수많은 무사들의 경제적 몰락을 불러왔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 접어들어서 무사들은 자신들의 궁핍한 생활을 막부 탓으로 돌렸다. 이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토토사이트 썸. 결국 가마쿠라 막부는 악마의 디테일에 발목이 잡힌 셈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 정권이 무사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내놓은 부채탕감 강제조치 대신에 새롭게 등장한 화폐경제 생태계에 이들이 적응하도록 유도하고 안착시키려는 정책을 구사했더라면 에이닌 토토사이트 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달리 내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쇼초 도잇키’ 당시에 세운 토토사이트 썸(부채 탕감) 기념비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쇼초 도잇키’ 당시에 세운 토토사이트 썸(부채 탕감) 기념비 [출처 : 야후재팬 화상]

토토사이트 썸의 후유증, 민중봉기

가마쿠라 막부가 몰락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무로마치 막부가 새롭게 들어서자 백성들은 가마쿠라 시대의 에이닌 덕정령을 선례로 거론하면서 부채탕감 즉 덕정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봇물 터지듯 분출되었다. 이 시기의 덕정령 요구는 민중봉기로 변질, 발전되었다. 1428년 8월에 일어난 ‘쇼초 도잇키’가 그것이다. 이 민중봉기는 교토 인근의 오미(현 시가현) 사카모토 마을에서 운송업자와 농민들이 덕정을 요구하며 은행이나 전당포 역할을 하던 도소를 습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차용증 문서들을 찢어버리고 창고에 보관 중이던 담보물들을 탈취토토사이트 썸. 이 폭동은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불씨는 13년이 지난 1441년에 되살아나서 오미 지역에서 2차 봉기가 발생한다. 수만 명에 이르는 민중들은 교토 주변 16곳에 진을 치고 교토로 통하는 모든 길목들을 봉쇄하면서 “만약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교토 시내를 불태우겠다”라고 위협하면서 부채탕감을 압박토토사이트 썸. 결국 무로마치 막부는 민중봉기에 굴복하여 덕정령을 발표하고 만다. 이는 무로마치 막부가 인정한 최초의 덕정령이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컸다. 그 이후에 곳곳에서 덕정을 요구하는 하극상 민중봉기가 일어나 무로마치 막부의 종말을 재촉하면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일본 내란 시기 ‘전국시대’ 개막의 트리거로 작용하게 되었다. 필자는 일본역사를 들여다보면서 현재의 모습을 투영시켜 보는 작업을 해보곤 하는데, 때로는 놀랄 정도로 흡사한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bons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