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로 향하는 다이묘 행렬((參勤交代)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에도로 향하는 다이묘 행렬((參勤交代) [출처 : 야후재팬 화상]

도쿠가와막부의 도라에몽토토체제

17~18세기 도쿠가와막부 전기와 중기, 일본은 막부 창업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구축한 평화 체제 하에서 상인 세력이 주도하는 상업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며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 도라에몽토토성장기를 맞이하는데, 이 에너지는 그 이후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번 회에서는 ‘전쟁 없는 세상이 도라에몽토토 번영을 담보한다’는 관점에서 일본 상업자본주의 주역으로 등장한 상인들의 활약상을 소개하겠다.

도라에몽토토체제 구축을 위한 다이묘 통제 정책

도쿠가와 가문의 19대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히로 씨는 몇 해 전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이라면 정말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라며 이에야스의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소개했다. 140여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 도라에몽토토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탄생한 도쿠가와막부는 외세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 다이묘(영주)들에 대한 삭탈관직과 도라에몽토토에 남아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사에 대한 추방 조치를 단행했다. 이어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전국 다이묘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그들이 거느린 가신들과 무기 수를 제한하고 함선 보유도 규제했다.

그리고 모든 다이묘들에 대해서 새로운 수도인 에도에 격년제로 체류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그들의 본부인과 후계자를 에도에 인질로 상주하도록 강제했다(參勤交代). 이 조치는 전란의 불씨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통제 장치였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에도와 영지 간 왕복 비용과 쇼군에게 바치는 헌납품, 식솔들의 에도 체재 경비 등에 막대한 자금을 지출했는데 이는 연간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보다 다이묘의 재정을 더욱 옥죄는 것은 에도 신도시 건설과 경작지 확대를 위한 제방 구축, 운하 개설 등의 토목공사 부역에 동원되는 일이었다(天下普請, 手伝普請). 자신의 비용으로 가신들을 동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막대한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다이묘들은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들었다.

자금난을 견디다 못한 다이묘들은 오사카나 도쿄의 유력 대부업자 상인들에게 자신의 영지에서 산출될 쌀 등을 선담보로 잡고 고리 자금을 빌리게 되어 만성적 채무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는 다이묘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막부의 의도와 상인의 이윤 추구라는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도쿠가와막부의 이런 다이묘 통제 수법은 막부 초기의 정권 안정에 크게 주효했다. 한편 이때부터 채권자인 유력 상인들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무사 세력을 실질적으로 압도하는 힘을 갖기 시작했다.

세계 선물거래의 효시, 오사카 도시마쌀거래소 [출처 : 위키피디아]
세계 선물거래의 효시, 오사카 도시마쌀거래소 [출처 : 위키피디아]

도라에몽토토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

전란이 멈추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자 농민들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에도 등지에서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식량 수요가 증가하여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경작지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 결과 경지면적은 약163만 정보에서 약300만 정보로 두 배나 급증했다. 나아가 경지면적 확대는 농업생산의 증가로 이어지면서 도라에몽토토발전을 촉진시켰다. 이 시기는 ‘대개척, 대개간의 시대’로 불린다.

전란의 종식은 인구 증가를 유발하여 1600년경에 1700만여명이었던 일본의 인구가 1721년에는 3100만여명으로 100년 사이에 1400만여명의 증가세를 보였다. 이 추세에 힘입어 도쿠가와막부 후반에 에도는 인구 100만명 규모의 세계 최대급 도시로 발전했다. 인구 증가는 도라에몽토토 규모를 확대시킴으로써 일본 상업자본주의가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창의적인 경영기법이 선을 보이는데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가 오사카 도시마쌀거래소에서 시작되었고 최초의 복식부기도 선보였다. 또한 전국 244곳에서 1694종류의 지역화폐가 유통되기도 했다. 이 시기를 일본 도라에몽토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도쿠가와막부 시대 전기, 100년간은 일본 근대 이전 역사 이래 최초의 고도도라에몽토토성장 시대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어 도라에몽토토발전의 조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바탕으로 고도도라에몽토토성장을 이룩한 사례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평화국가로 전환한 일본과 한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와 고도성장을 달성한 대한민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히메현의 스미토모 벳시동광산 [출처 : 스미토모금속광산]
에히메현의 스미토모 벳시동광산 [출처 : 스미토모금속광산]

무사 세력을 압도하는 유력 상인들의 출현

도쿠가와막부 초기에 사회가 안정을 되찾자 인구는 증가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도라에몽토토발전이 이뤄진다. 이에 따라 소비시장이 확대되자 수많은 상인들이 창업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상인들이 요도야, 고노이케, 스미토모, 미쓰이 등이다.

천하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어느 날 오사카 상인, 요도야 조안을 불러서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안은 “전국에서 오사카로 들어오는 건어물의 시가를 매기는 독점권을 주십시오. 그리고 쌀 시세를 내가 결정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흔쾌히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조안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섬멸한 오사카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전투 진지와 군량미를 제공하여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권력자 이에야스의 후광에 힘입어 재계의 실력자로 떠오른 그는 쌀시장 개설을 통해서 총자산이 약 20억량(현재 가치로 약 200조엔, 한화 환산 약 1900조원)이란 막대한 부를 쌓으며 오사카를 ‘천하의 곳간’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고노이케는 양조업에서 시작하여 해운업, 금융업(다이묘 상대 대부업, 환전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면서 거금을 손에 쥐었다. 전국 100여 곳의 다이묘들이 고노이케에게 자금을 빌렸는데 시중에서는 “고노이케가 한번 화를 내면, 천하의 모든 다이묘들이 겁에 질려 얼굴빛이 흑색으로 변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다이묘들에 대한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유력 상인이 무사 세력을 압도한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고노이케는 현재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의 뿌리 기업이다.

도라에몽토토은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동 산출국이었는데 스미토모는 에히메현 벳시에서 동광산을 발견하면서 크게 도약했다. 채굴하여 정련한 동을 해외로 수출하고 설탕을 도라에몽토토에 수입하는 무역업에 손을 뻗치고, 환전사업에도 참여해서 큰 부를 쌓았다. 스미토모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재벌인데 현재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의 모태이며 미국 US스틸을 인수한 도라에몽토토제철의 주요 구성원이 기도 하다.

1670년대 전당포와 양조장 사업에서 출발하여 에도에 면직물을 취급하는 포목점을 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쓰이는 막부에 물품을 납품하는 공식 조달업자가 되고 막부의 공금을 환전해주는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다이묘를 상대로 하는 환전 사업과 대부업에도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미쓰이는 오늘날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의 모태다.

‘공동체 내부의 평화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사회 인프라’라는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17세기 초에 이에야스가 구축했던 도쿠가와막부의 평화체제는 도라에몽토토 번영의 약속어음이었다.


bons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