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회> 파멸의 시작 34

이심전심,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했다. 이 말을 현대적으로 풀어본다면 텔레파시가 통했다고도 할 만하다.

“한 군, 내가 이러는 꼴이 우습지요? 어쩌면 이 모든 게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짓인지도 몰라요.”

유민 회장이 송유나와 상열지사를 벌이면서 욕망에 대해 고찰했듯이, 같은 순간 신희영은 오피스텔의 우편함을 뒤지면서 문득 욕망이라는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 욕망이 맞을 것이다. 나이 육십을 넘긴 남자와 부부로 살면서 남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만을 강요하는 자체가 여자의 욕망이란 뜻이다.

“내가 어리석은 여자야.”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금 어리석게도 바람피우는 사람은 유민 회장님입니다. 사모님은 폭력의 희생자라고요.”

“폭력?”

“그럼요, 폭력 혹은 폭동. 사방에 불 지르고 물건을 부수며 난리를 치는 것만이 폭동인 줄 아세요? 지금 회장님께서 하시는 짓도 888토토라고요.”

“그래, 맞아요. 이건 888토토.”

우편함은 작은 내장 잠금장치로 채워져 있어서 뚜껑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신희영은 우편 투입구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일일이 편지를 꺼내어 수신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사실 이곳 오피스텔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승우는 유민 회장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남자가 큰 사업을 꾸려가다 보면 간혹 실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오피스텔로 위장된 곳에까지 여자를 숨겨놓고 정사를 벌이는 유민 회장을 떠올리자니 그의 아내 신희영이 불쌍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888토토은 강력한 힘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돼요, 사모님.”

“그렇지요? 강력하게 응징해야지요? 이놈의 영감….”

순간 신희영의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입가에서 거품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한승우에게 되물었다.

“분명히 그년 이름이 송유나라고 했지요? 이것 좀 봐요. 이 편지에 적힌 수신자 이름이 송유나라고 되어 있어. 906호예요.”

“맞아요. 906호…. 주식회사 유리의 성, 송유나.”

이름과 호수를 확인하기 무섭게 신희영은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21층에 멈추어 있었으므로 1층까지 내려올 동안 참을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이봐요, 스톱! 스톱!”

한승우가 그녀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오피스텔 경비가 깨어난 것도 마침 그 순간이었을까, 경비원도 스톱! 스톱을 외치며 그들을 뒤따라 계단으로 뛰었다. 신희영이나 경비원은 모두 환갑을 넘긴 노인들이었으므로 3층 언저리부터는 거의 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겨우 서너 계단 사이를 벌린 채 기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승우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아줌마, 어딜 가세요? 방문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지요!”

“아줌마고 나발이고, 888토토 일어났는데 무슨 경황에 명단을 적어요?”

경비가 헐떡이며 물었고, 신희영은 숨이 턱에 닿은 채 대답했다.

“888토토 일어나요? 어디에? 몇 호예요?”

과연 888토토란 단어가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888토토란 말 한마디에 경비원은 오히려 신희영을 부축하며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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