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날개에 숨긴 칼 (12) 글 채희문 /그림 유현숙
유민 회장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 양편으로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 전략기획실과 스포츠마케팅 TF팀은 오늘따라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팀장 뒤쪽 벽면으로는 조자룡이 쓰다 버린 낡은 창이나 되는 듯 드라이버 골프채 한 자루가 걸려 있을 뿐이었고, 그 밑에 붓글씨체로 촌스럽게 휘갈겨놓은 ‘My Way’라는 글귀만이 초라할 뿐이었다.
“마이 웨이라…좋지, 좋은 말이야. 장기판에 졸만 가득한 걸 보니 차ㆍ포는 진작 떨어진 모양이로군.”
실장ㆍ팀장은 간데없고 말단 직원만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모습에 그는 공연히 신이 나는 중이었다. 눈엣가시로 여겨지던 마누라 신희영이 멀리 사라진 것만으로도 좋아죽을 판인데, 전략기획실장입네 스포츠마케팅 팀장입네 하고 날뛰던 인간마저 굴비두름처럼 엮여져 사라진 것을 보니…. 어허, 좋을시고!
“웬수들 꼬락서니를 안 보니 속이 다 후련해.”
유민 회장은 화기에 찬 눈빛으로 현성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도 하지, 맞은 편 전략기획실에 마누라 신희영이 자리를 꿰고 앉아있을 때엔 답답하고 숨 막히던 집무실이 어쩌면 이리도 상쾌한 별장처럼 여겨지던지.

“사모님께선 하와이에 계신대요. 하와이 일대 골프장을 모두 순례하신 뒤에 미국 본토로 건너가실 모양이에요.” “경사났군. 아예 이민을 보내버리면 좋겠어.”
“그러게 말예요. 골프는 아무나 치나요? 요즘엔 개나 소나….”
현성애는 아차!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직은 이렇게 함부로 나설 때가 아니라는 걸 즉시 깨달은 것이다. 지갑은 복권이 당첨된 것을 확인한 후에 열어도 늦지 않는 법이다. 두 눈으로 유민 회장이 부도를 내고 깡통 차는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충실한 비서로서의 면모를 보여야만 한다.
“그래, 개나 소나 골프 친다고 거들먹대는 꼴을 보면 기가 막혀. 집사람이 사기꾼들 농간에 휘둘리는 꼴도 가관이고.”
유민 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을 반복했다. 이를테면 현금시재를 확인하거나 B2B 어음 지불일자를 확인하는 일, 매입매출 누계를 검토하고, 미입금ㆍ미지불액을 수첩에 따로 적어놓는 일 등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불현듯 현성애를 불러세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현양 이름으로 파킹해놓을 걸…후회막급이야.”
그가 현성애를 당신, 혹은 자기라고 부를 때와 현양이라고 부를 때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당신, 혹은 자기라고 호칭할 때는 지극히 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공적인 생각에 몰입해 있을 때는 어김없이 현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모르긴 해도 제련그룹의 업무에 크게 지장이 생긴 모양이었다.
“무엇을 제 이름으로 파킹해요?”
“워런트말이야. 제 삼자 명의로 박아놓은 워런트에 문제가 불거졌어. 그러기에 애초에 머리 검은 짐승은 믿을 게 못되거든?”
워런트라면 현금 대신 챙겨놓는 보증서를 말한다. 기업마다 대주주는 시세차익이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서 워런트를 몰래 보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경우 실물로 소유하게 마련인 보증서는 제 삼자와의 관계 여하에 따라 심한 경우엔 한낱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금액이 얼마나 되는데요? 회장님.”
“많지는 않아. 다섯 장이야. 그렇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큰 돈이지. 당장에 500억을 마련해야할 판이니 그것마저 새로운데….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혹시 권도일에게 전해줄 톱뉴스가 흘러나오지는 않을까? 현성애는 귀가 솔깃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