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4회> 죽음의 계곡 16
‘법보다 주먹’이란 말이 뜻하는 것은 매사에 원칙을 따지기보다 저돌적으로 들이미는 것이 효과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인간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동물적인 해결책을 선호하는 미학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흐흐흐….’
동물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권도일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렇게 웃음 짓고 있었다면,
‘아이고오~.’
꼬리 내린 도종호 상무는 속으로 땅을 치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물론 송달민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하지만 로비스트인 송달민 정도야 새우젓통 옆에 딸린 덤통에 불과하므로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끝내세요.”
권도일은 한껏 아량을 베풀었다. 즉시 달려오라는 명령에 1분 내로 아랫도리에 수건만 걸친 채 달려온 것부터 이미 기선은 제압한 셈이었다. 도종호와 송달민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제 방을 향해 돌아갔다. 각자 되돌아가서 다시 파트너를 끌어안고 상열지사를 계속할지 말지는 물론 각자의 몫이었다.
권도일은 빈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고개를 곧추세우는 상대와의 싸움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일 바에야 스스로 신성한 의식이 될 수 있도록 연출해야만 한다. 지금 그는 이 의식을 연출하고 훌륭히 연기해 낸 셈이었다. 다만 연기가 끝났을 때 밀려오는 외로움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외로워… 야스나리가 자살한 심정을 헤아릴 만도 하군.’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설국’이란 명작 소설을 쓰고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쥔 일본 작가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추구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이르지 못하는 불가피한 현실에 자살하고야 만다. 느닷없이 노벨상을 탄 일본 작가를 왜 들먹이냐고? 권도일이 저 토토사이트 필드원 고스톱을 치다가 자뻑을 하고 말더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그는 스스로 도취감에 빠져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기고만장, 오버액션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애 씨? 나예요, 도일.”
그는 전화기를 끌어안고 번호판을 찾아 꾹꾹 눌렀다. 철학적으로 깊은 외로움에 빠졌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마음속에 늘 품고 있던 연인, 현성애였다. 물론 조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함께 뒹굴며 정열을 불태우던 박성애로부터 동일한 이름을 연상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전무님.”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특급 정보를 알려주려고 전화했어. 거성자동차에서 랠리경기 협찬을 취소한다는 군. 오늘 결정 난 사실이에요.”
“그래요? 무슨 까닭이 있대요?”
“유민이 토토사이트 필드원 챙기는 게 배 아프단 소리겠지. 거성에서도 직접 랠리 팀을 창단하기로 했어요. 물론 내가 스카우트되어서 선수로 뛰게 될 거야.”
“오히려 잘 되었네요. 전무님이 직접 나서서 유민 제련그룹 선수로 뛰는 유호성을 박살 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경쟁상대도 안 되잖아요? 유호성 따위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머신이 문제야. 내사 거성에서 뛰는 한, 국산 거성자동차를 몰아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유호성은 보란 듯이 외제 명차를 타겠지. 어떤 머신을 탈까? 란치아스트라토스? 스바루? 푸조? 국산 차로 그 불후의 명차들을 추월할 수 있을까?”
권도일의 목소리엔 힘이 빠져 있었다. 어리광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걱정에 빠져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조용히 듣고 있던 현성애는 밝게 말을 이었다.
“내가 도울게요. 튜닝이라면 내가 지존이잖아요. 더구나 나는 유호성의 미캐닉이니까 낙랑공주처럼 적의 심장부에 숨어서 당신을 돕게 되는 거예요. 어때요, 멋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