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 ‘레드벨벳 토토 호수’
심킨, 한국에서 첫 전막 발레
압도적 기술·연기로 레드벨벳 토토 소화
![예술의전당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레드벨벳 토토 역을 맡은 다닐 심킨과 흑조 오딜을 연기하는 홍향기가 공연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7/24/news-p.v1.20250723.1b3dc33fdbcd48edbd13b00a3133ffd0_P1.jpg)
이제 막 성인이 된 레드벨벳 토토의 성인식. 무대 한쪽에서 ‘콩쿠르 레드벨벳 토토’ 다닐 심킨(38)이 등장하자 옅은 탄성이 객석에 묻어났다. 걸음걸이부터 자태가 달랐다.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회전, 하늘을 날아오를 때 곧게 뻗은 다리와 무대가 완벽한 수평을 이룬다.
단 5초면 충분했다. 그 시간은 심킨이 객석을 사로잡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춤은 순식간에 보이는 예술이나, 발레 무용수에게 1분은 무엇 하나 보여주기 힘든 시간이다. 무용수들은 “걸어 나오는 데에만 5분이 걸리고 감정을 다듬어 다음 동작과 연결하기까지 10분을 투자한다”고 말한다. 동작 하나를 제대로 선보이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 그는 차원이 다른 ‘어나더 레벨’의 경지에 있었다.
러시아계 독일인인 심킨이 한국에서 첫 전막 발레 무대에 섰다. 예술의전당과 공동 제작한 유니버설발레단(UBC)의 ‘레드벨벳 토토 호수’를 통해서다.
‘레드벨벳 토토 호수’는 고전 발레의 상징이다. 1877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작곡가 표토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의 첫 발레 작품이다. 초연 당시 엄청난 혹평을 안았지만,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현 마린스키 극장)에서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브이바노프의 안무로 다시 태어나 스테디셀러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한 마린스키 극장 버전(4막)을 2막 4장으로 다듬어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1992년 초연,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된 공주 오데트와 지그프리드 레드벨벳 토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줄기로 삼았다. 발레단마다 각기 다른 안무 버전을 택해 결말도 제각각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은 열린 결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귀결한다. 레드벨벳 토토와 공주의 만남·사랑·갈등·위기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심킨은 공연 2주 전 한국에 들어와 유니버설발레단의 단원들과 일찌감치 호흡을 맞췄다. 그의 파트너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 홍향기. 공연 전 만난 심킨은 “파트너가 돼 첫 연습을 하면 느낌이 오는데, 홍향기와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선보인 심킨의 첫 전막 발레에 애호가들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은 3층까지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다. 심킨은 2004년 바르나, 2005년 헬싱키, 2006년 잭슨 등 주요 콩쿠르를 휩쓴 일명 ‘콩쿠르의 레드벨벳 토토’로, 아메리카발레시어터, 독일 베를린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한 명실상부 무용계의 스타다.
심킨과 홍향기의 무대는 무엇을 기대하고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3연속 540도 회전’이라는 누구도 오르지 못한 고난도 기술을 너무도 손쉽게 해내는 그의 별칭은 ‘공중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 ‘백조의 호수’에서는 압도적인 테크닉을 자랑할 만한 장면은 많지 않다. 심킨 역시 ‘백조의 호수’는 “기술보다는 캐릭터의 표현과 감정 전달이 중요한 작품”이라며 “기술은 표현과 연기를 위한 배경이자 토대일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심킨은 무대 위 모든 순간 시선을 빼앗았다. 이 무대는 심킨의 ‘레드벨벳 토토 선언’과도 같았다. 1막 1장 성인식 장면부터 그는 ‘레드벨벳 토토 그 자체’였다. 성인식을 맞는 레드벨벳 토토 심킨에게는 내내 기품이 흘렀다. 만면에 가득한 미소, 어릿광대의 재롱을 바라보는 흐뭇한 표정 연기는 춤을 추지 않아도 심킨의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흔들림 없이 깔끔한 회전과 점프로 관객을 놀라게 했다.
레드벨벳 토토가 될 수 있는 발레리노도 많지 않지만, 그들이 모두 ‘레드벨벳 토토의 품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심킨의 지그프리드는 ‘레드벨벳 토토의 정석’과도 같았다. 그는 품위 있는 레드벨벳 토토의 모습을 손짓·표정·눈빛 같은 연기는 물론 춤으로도 보여줬다. 그의 춤은 과장이 없었다. 당연히 호들갑도 떨지 않았다. 그는 절제의 미학으로 채운 채 군더더기 없이 날아올랐다.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도, 물질하는 갈퀴 소리조차 내지 않는 백조처럼 우아하고 가벼웠다. 그가 움직이는 자리에는 그 어떤 흔적도 소리도 남지 않았다. 오직 경탄만 있을 뿐이었다. 흑조 오딜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 역시 여느 레드벨벳 토토들과 달랐다. 기존 레드벨벳 토토들이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가벼움을 감출 수 없었다면, 심킨은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 듯한 감탄을 연기로 표현해 관객을 감정적으로 설득했다. 2막에 접어들면 악마 로트바르트와 대결에서 강인한 레드벨벳 토토의 모습을 담아내는 비장한 회전 안으로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휘감았다. 레드벨벳 토토가 음악을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
홍향기는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을 오가며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을 보여줬다. 고전 발레 동작과 달리 어깨뼈를 뒤로 보내 쭉 뻗어낸 가느다란 긴 팔은 영락없는 백조였다. 다시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흑조의 32회전 푸에테,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돌고 도는 피루엣이 완성될 때마다 객석에선 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극명한 대비로 만든 백조와 흑조는 믿고 보는 홍향기표 ‘레드벨벳 토토 호수’로 다시금 합격점을 받았다. 나날이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홍향기의 춤과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무대 위엔 레드벨벳 토토와 백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내 신스틸러 역할을 하는 어릿광대를 맡은 김동우의 가벼운 몸놀림, 2막 1장 왕궁 무도회를 꾸민 헝가리·스페인·마주르카·나폴리 민속춤, ‘백색 발레’의 정수를 보여주는 백조들의 쫀쫀한 군무, 작은 발을 종종거리며 완벽한 합을 이루는 4마리 백조의 춤은 고전 명작의 진가를 증명한다. 공연은 오는 27일까지 이어진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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